서진영교수의 중국정치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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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초점인물-사회학의 태두 費孝通선생 서거하다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27 | HIT : 10,818 | VOTE : 1,157 |

       현대 중국 사회학과 사회인류학, 민족학의 창시자이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국제적으로 저명한 훼이 쌰오통 (費孝通) 선생이 지난 2005년 4월 24일 베이징에서 향년 95세로 마침내 서거하였다. 1930년대에 이미 내외에 그 학문적 명성을 날린 훼이 쌰오통 선생의 영정은 그의 자택과 그가 마지막으로 봉직했던 베이징대학 법학관 내에 설치되었고, 후진타오와 장쩌민 등 중국 최고 지도부와 선생의 동료와 제자들을 포함, 약 6천여명의 애도와 조문을 받은 후 4월 29일 베이징 八宝山에서 유체고별식을 가짐으로써 중국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 거인의 시대를 마무리하였다.

이처럼 현대 중국 사회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훼이 쌰오통 (費孝通)선생은 누구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 우선 이 홈페이지 <중국 인물정보-지식인>란에 올려져 있는 훼이 샤오통 선생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Fei Xiaotong: 費孝通 (1910-2005): 현대중국 사회학, 사회인류학, 민족학의 창시자; 중국민주동맹을 기반으로 정치적 역할을 한 지식인으로 2005년 4월 24일 북경에서 사망; 향년 95세; 江蘇省 吳江 출신; 1930년부터 燕京대학에서 사회학을, 33년부터 淸華대학에서 形質人類學을, 36년부터 영국 런던대학에서 B.K. Malinowski 교수 지도하에 사회인류학을 수학, 1938년에 ‘중국농민 생활’이란 제목으로 박사학위 획득; 1938년 귀국, 청화대학, 雲南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고, 농촌 사회 조사활동을 계속했고, 1944년 미국 방문후 귀국해서 西南연합대학과 청화대학 교수 겸직; 45년 중국민주동맹 참가;

건국시기에 전국 정협에 참가; 1956-57년에는 운남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사회조사를 바탕으로 소수민족 식별 이론과 실천면에서 공헌; 그러나 1957년 반우파투쟁의 대상으로 핍박받으면서 그 후 20여 년간 연구 활동 중단; 그러나 1978년 이후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장, 사회학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사회학 부활, 농촌 공업화와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는등 활발한 학문적 활동; 특히 <小城鎭-大問題> (1983년); <中華民族 多元一體構造論>(1988년)등을 발표, 중국적 농촌 발전 모델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기도 함;


저서는 그의 런던대학 박사학위 논문 <江村經濟-中國農民的 生活>을 비롯하여 <祿村農田> <生育制度> <鄕土社會>등 다수; 1924년부터 1999년까지의 각종 그의 글을 모아 14권의 《費孝通文集》이 편찬 출판. (인물정보-지식인 Fei Xiatong)


이상에서 간략히 소개한 훼이 쌰오통 선생 (1910-2005년)의 일생은 시종 일관 사회과학자로서 연구 활동에 집중됐지만, 역사의 격동기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현실이 주는 제약과 한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다. 특히, 현실 참여적인 지식인으로 학문 탐구와 더불어 현실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던 훼이 쌰오통 선생은 제한적이나마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정과 사회주의사회의 건설 과정에  참여하면서 명예와 더불어 굴욕도 경험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훼이 샤오통 선생의 인생 굴곡을 학문 활동 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 구분하여,  인생과 학문 준비기(1910-1935)-->인생과 학문 성숙기 (1936-1949)--> 좌절과 침묵의 시기 (1950-1978)-->부활과 제2의 황금기 (1979-2005)로 나누어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이와 같은 훼이 샤오통 선생의 인생 기록에 대한 자료는 훼이 샤오통선생 사망을 계기로 마련한 중국의 인터넷 매체, 이를테면 人民网, 中國网, 그리고 新浪网의 특집 보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 人民网 종합보도 : 第一解读:富民书生 费孝通 (http://politics.people.com.cn/GB/1026/3350277.html)

- 中国网 综合消息 : 费孝通逝世 享年95岁 传奇一生 (http://www.china.com.cn/chinese/2005/Apr/847440.htm)

- 新浪网 특집 : 费孝通 逝世 (http://news.sina.com.cn/z/fxtss/index.shtml)


      (1) 인생과 학문 준비기 (1910-1935)

      훼이 샤오통은 1910년 11월 2일 장쑤 우장 (江蘇省 吳江縣)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이 일본 유학도 했고, 그의 고향 마을인 우장(吳江)에서 제1중학교를 설립 운영할 만큼 잘 알려진  지방 유력자이며 교육자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역시 유치원을 창건 운영할 만큼 교육과 학문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훼이 샤오통은 4세부터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 고향 마을 부근의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1928년에 난징 (南京)에 있는 東吳대학에 입학, 2년간 의예과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중국 사회는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면서 젊은이들도 개인의 출세보다는 중국 사회의 변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이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훼이 쌰오통은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의 길보다 중국 사회를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1930년에 베이징에 소재한 옌징대학 (燕京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33년 옌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훼이 샤오통은 곧바로 칭화대학 (淸華大學) 대학 대학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학과 인류학을 전공하는 사회과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칭화대학에서 훼이 샤오통은 당대에 유명한 현대중국 사회학자 吴文藻선생에게서 사회학을, 그리고 러시아 출신 史禄国교수에게서 인류학을 수학하였다.  

      1935년 칭화대학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훼이 샤오통은 졸업시험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국비해외 유학생 자격도 취득, 학문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이런 학문과 인생의 전환기를 맞아 훼이 쌰오통은 옌징대학 시절부터 연인이었던 王同惠와  어느 호반에서 로맨틱한 결혼식을 가진다.

    옌칭대학에서 같은 서클 활동을 했던 두 젊은이들은 결혼 직후 신혼여행겸 학술 여행으로 廣西省 大瑤山 지역의 소수민족 마을로 현지조사를 떠난 것이 뜻하지 않았던 파국적 불행으로 끝나게 되었다. 험준한 大瑤山 지역에서 길을 잃고 헤 메던 훼이 쌰오통이 주민들이 파놓은 호랑이 굴에 빠져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원하려고 우왕좌왕하던 그의 젊은 아내 王東惠가 실족 사고로 익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훼이 쌰오통은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주민들에게 구원되었으나, 그는 씻을 수없는 喪妻의 비극을 안게 되었다. 두 젊은이가 결혼한 지 겨우 108일 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신혼의 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아내를 잃고, 몸도 다친 훼이 쌰오통은 고향 농촌 마을 (吴江县 开弦弓村)로 돌아가 건강 회복에 힘쓰는 한편,  틈틈이 그의 고향 마을을 대상으로 농촌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계속하였다. 훼이 샤오통은 바로 이 시기에  실시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유학, 런던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이때 그가 현장조사를 실시한 지역을 江村마을이라고 명명하였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江村經濟>라고 하였다. 훼이 샤오통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주장한 <江村經濟>이론은 현대 중국 사회학과 인류학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강촌 마을은 사회학계와 인류학계의 관심 대상 지역이 되었다. 

 

(2) 인생과 학문 성숙기 (1936-1949)

1935년에 뜻하지 않은 인생의 비극적 사건을 경험한 훼이 쌰오통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정대로 1936년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영국 런던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류학자인 B. M. Malinowski의 지도하에 박사과정을 수료한 훼이 샤오통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강촌마을에서 수집한 현장조사 결과를 기초로 그의 박사학위 논문 <江村經濟-중국농민의 생활>을 완성, 발표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서언에서 그의 런던대학 지도교수인 Malinowski교수는 훼이 쌰오통의 박사학위 논문이 인류학의 현장조사와 이론 발전에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예언처럼 훼이 쌰오통의 박사학위 논문은 런던대학 인류학과에서 필독서로 추천되었고, 중국에서도 그의 박사 논문 주제인 <강촌경제> 이론이 오늘날까지 중국의 농촌사회발전과 농민생활을 설명하는 주요한 이론이 되고 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费孝通和他的江村经济之路> (인민일보 2005년 4월 26일자 참고) (http://politics.people.com.cn/GB/1026/3348590.html)



그렇다면 과연 훼이 쌰오통의 <江村經濟>란 무엇인가. 훼이 쌰오통은 통상적으로  사회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농민들의 제사와 의식 활동 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들보다 농민들의 구체적 경제생활에 대해 치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토지 소유와  인구분포, 그리고 농민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현장 조사를 통해 농민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도시화와 현대화가 농촌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결국 훼이 샤오통은 처음으로 농촌사회의 생산력과 사회구조의 변화가 어떻게 중국 농촌사회의 근대화와 도시화와 연결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농민들이 단순히 농업에만 종사해서 생계유지가 어렵다는 것, 잠업과 같은 부업을 통해 추가 수입원을 개발해야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나름대로 발전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훼이 샤오통의 첫 번째 현장조사  대상이었던 강촌마을을 20여 차례 이상 방문하면서 계속적으로 조사, 확인한 것으로서  후에 훼이 쌰오통으로 하여금 ‘인구는 많고 토지는 비좁은 중국 농촌 현실에서 농촌사회가 살 길은 농업과 공업의 상호 보완 발전이라는 명제  (“人多地少,农工相辅”)를 제기하게 된다. 이런 관점은 1980년대 훼이 쌰오통으로 하여금 향촌기업 발전을 통한 농촌사회 공업화운동, 그리고 유명한 溫州 모델에 대한 이론을 제창하게 했다고 하겠다.



이처럼 훼이 쌰오통은 1938년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평생 그의 학문적 관심사항이 되는 중국 농촌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제시하여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귀국하여, 윈남대학과 칭화대학등에서 교편을 잡고 활동하면서도 농촌과 공장지역, 그리고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현지조사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때 그는 현지조사 보고서 결과를 《禄村农田》이란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한 가지 특기 사항은 훼이 쌰오통이 재혼을 했다는 것이다. 1939년 마침 인도네시아에서 귀국한 농촌출신의 孟吟 여사와 雲南省 昆明에서 재혼, 해로하게 된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훼이 쌰오통이 재혼한 다음 해에 딸을 낳게 되는데 훼이 쌰오통은 그의 전처인 王東惠를 잊지 못해, 그의 딸 이름을 费宗惠라고 하였고, 아명으로 ‘小惠’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실, 훼이 쌰오통은 이 시기에 그는 런던대학에서 영문으로 쓴 박사학위 논문을 중국어로 번역,  <江村經濟>라는 첫 번째 대작을 출판하면서 불행하게 요절한 그의 첫 번째 부인에게 헌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귀국한 이후 훼이 쌰통은 재혼하면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게 되고,  그의 활동의 범위도 조금씩 확대되었다. 1943년 6월부터 1년간 미국정부 초정으로 미국을 들러보고 귀국한 후 1944년 西南연합대학과 칭화대학 교수를 겸직했고, 진보적 지식인들의 운동단체인 중국민주동맹에도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훼이 쌰오통을 비롯한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 반대하고, 국민당 정부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도전적인 입장을 공개 표명함으로써 국민당 정부하에 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훼이 쌰오통은 양심에 따라 시민사회의 자유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운동과 시민운동에 종사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 발표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중문판인 <江村經濟>를 1939년에 출판했고, 1940년대에도 중국 사회학과 인류학의 고전이 된 저작들, 이를테면 <生育制度> <鄕土中国>, <皇權과 紳權> <工業文明의 社會問題>등을 출판하였다. 이 시기가 훼이 쌰오통의 학문적인 성숙기이며 전성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시기이었다.



(3) 좌절과 침묵의 시기 (1950-1978)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정에서 훼이 쌰오통은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전략의 일환으로 구성 운영된 제 1기 전국 정치협상회에  중국 민주동맹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전국정치협상회의는 중국공산당 중심의 당국가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 다양한 정파와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헌법제정과 건국작업을 뒷받침하는 조직이었고, 훼이 쌰오통은 그가 소속된 민맹 (중국민주동맹) 대표로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건국 초기에 훼이 쌰오통은 구시대 진보적 지식인의 대표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건국 작업에서 소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건국 초 계급적 화해와 단결을 강조하던 신민주주의 시대가 곧바로 성급한 좌파들의 사회주의 개조운동으로 급전환되면서 훼이 쌰오통과 같은 구시대 지식인들의 입지는 대단히 좁아지게 되었다.


특히, 그가 몸을 담고 있던 칭화대학이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이공계 대학으로 전문화되고, 1952년에는 대학 개편과 더불어 부르조아 학문이라고 비판을 받은 사회학 계열이 폐지됨으로써 훼이 쌰오퉁을 비롯한 중국의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졸지에 학문적 활동공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연 훼이 쌰오통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사회학자로서 입지를 잃은 훼이 쌰오통이 그대로 좌초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새로운 학문적 활로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것은 사회학과 인류학 탐구와 더불어 그가 중시했던 중국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이었다.


1950년대 훼이 샤오통은 여러 차례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연구조사활동을 주도했다. 1951-52년은 중앙정부가 조직 파견하는 민족지구 조사 방문단에 참여하여 소수민족지역을 둘러보았고, 1956-57년에는 雲南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사회조사를 바탕으로 소수민족 식별 이론을 개발하는 업적도 쌓았다. 또한 1952년이후 1957년까지 칭화대학을 떠나 중앙민족학원에서 강의하면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입안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1988년에 훼이 쌰오통은 유명한 <中華民族 多元一體構造論>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훼이 쌰오통은 사회과학자로 활동을 계속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57년이후 훼이 Ti오통은 더 이상 사회학자로, 인류학자로, 그리고 소수민족 연구를 하는 민족학자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1957년 전국적으로 반우파투쟁이 전개되면서 훼이 쌰오통과 같은 구지식인들, 민주당파들, 농민들의 자본주의적 경제성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 이 모든 이들이 우파분자로 분류, 비판의 대상이 되고 굴욕과 침묵을 강요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66년 이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훼이 쌰오통과 같은 우파 분자들은 농촌 벽지로 추방당하고, 이른바 간부학교에서 노동개조라는 이름으로 온갖 굴욕적 교육과정 겪으면서 10여년이 넘게 암흑과 치욕의 세월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었다. 훼이 쌰오통을 비롯하여 당대에 유명한 구 지식인들에게 1957년부터 1978년까지는 그야말로 잃어버린 세월이요, 굴욕과 침묵의 시대이었다



(4) 부활과 제2의 황금기 (1979-2005)

 

마오쩌둥과 좌파가 지배하던 시대에 침묵과 굴욕을 강요당했던 훼이 쌰오통을 비롯한 구시대의 저명한 지식인들은 1978년 12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권이 등장하면서 복권-복직되면서 제2의 인생을 맞게 된다.

1978년말 훼이 쌰오통은 중국 사회과학원으로 복직되고,  민족연구소장을 거쳐 사회학 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사회학의 부활 작업을 주도한다. 따라서 1979년 중국 사회학회장에 취임, 본격적으로 중국 사회학의 재건을 지휘하고, 마침내 1982년에는 베이징대학 사회학계 교수로 복귀하였고, 1985년에는 베이징대학 사회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왕성한 학술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훼이 쌰오통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한다. 1987년에 그는 1945년 이후 몸담고 있던 정치단체인 민맹 (중국민주동맹)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88년부터 1998년까지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과 제6기 전국 인민정치협상회 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 당시 그는 또한 여러 가지 명예로운 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1981년 그는 대영제국 인류학회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류학자에게 수여하는 헉스리 기념메달 (Huxley Memorial Medal)을 받았고, 1988년에는 유엔이 수여하는 大英百科全書獎 (Encyclopaedia Britannica Prize)를 받았다. 그리고 1993년에는 일본 후쿠오카 (福岡)시가 수여하는 아시아 문화대상을 비롯하여 홍콩대학으로부터는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마카오의 동아시아대학으로 부터는 명예 사회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훼이 샤오통은 뒤늦게나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여 분주했지만, 역시 훼이 쌰오통은 학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그가 평생의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중국의 농촌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 그리고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그는 이 시기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것은 1983년 그가 발표한  <小城鎭-大問題> 란 논문을 통해 이론화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 지게 된 중국 특색의 농촌사회 발전 모델인 원주 (溫州) 모델과 쑤남 (‘蘇南)모델이었다.

  

사실, 훼이 쌰오통은 1938년의 박사학위논문인 <江村經濟>에서부터 줄기차게 중국 특색의 농촌사회 경제발전 모델에 대해 연구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7까지 강촌마을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농촌사회가 살 길은 부업을 활성화시키고, 농촌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사실은 1980년대에 그는 다시 溫州에서 발견하게 된다.

 

개혁 개방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사영경제가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 원주지방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훼이 쌰오통은 향촌기업을 모체로 농촌공업화를 추진하는 사례를 분석,  농촌 소도시 발전을 통해 중국 사회의 발전이란 전략 (小城鎭-大問題)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훼이 샤오통은 서구의 전면적 공업화-도시화의 경험과는 달리 중국의 원주 경험이 시사하는 <小城鎭理論>이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서도 농업이외의 다른 업종에 종사할 수 있는 길’ (離農不離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훼이 쌰오통은 초기에는 강촌 마을에 대한 현장 실시를 바탕으로, 그리고 후기에는 원주등 개혁 거점지역에 대한 사회조사를 바탕으로 중국 특색의 발전 모델을 모색하였고, 동시에 1988년에는 소수민족 정책과 관련해 중국은 55개의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사회이면서 동시에 한족을 중심으로 한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이론적으로 정리 제시한 <中華民族 多元一體構造論>을 제창하여 그 이후 중국 사회에서 다양한 종족간의 평화공존과 중국이란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애국주의 캠페인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훼이 쌰오통은 임종 직전까지도 다방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많은 업적을 냈지만, 그를 특히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첫째, 그는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철저한 현장조사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하였다는 점, 둘째, 중국 사회가 보이고 있는 보편적 성격과 더불어 중국 특색이 무엇인지 규명하려고 했다는 점, 셋째, 일생을 관통해서 일관된 주제, 이를테면 박사학위 논문 주제인 강촌경제에서 시작된 중국 농촌사회의 발전 모델에 대한 관심이 결국 <小城鎭理論>으로까지 계속되어 완결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실 참여적 지식인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진지한 학자로서의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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