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교수의 중국정치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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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초점인물-마오쩌둥 공식 약사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17 | HIT : 8,964 | VOTE : 778 |

지난 2003년 마오쩌둥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 사회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중국 당국은 마오쩌둥에 대해 비교적 공정한 평가를 제시하였다. 마오쩌둥은 만년에 엄중한 과오를 범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공로가 과오보다 크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 마오쩌둥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한 글을 번역 게재한다

 

毛澤東 생애에 대한 간략한 공식 소개

 
 

    毛澤東(1893~1976):위대한 맑스주의자, 무산계급 혁명가, 전략가이며 이론가;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시자이며 영도자. 호남 상담 (湘潭) 출신; 1893년 12월 26일에 농민가정에서 출생; 신해혁명 폭발한 이후 봉기한 신군에서 반년간 일반 병사로 복무 ; 1914-1918년에 호남 제일 사범학교에서 수학; 졸업 전 채화삼 (蔡和森)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신민학회 (新民學會) 조직; 5-4운동 전후에 맑스주의를 접하고, 1920년에 호남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창건함.

1913년 호남 성립 제4사범학교 예과생의 모습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에 참석한 후 중공당 호남 湘區위원회 서기, 장사 및 안원 등지에서의 노동운동 지도; 1923년에 중공당 3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당 중앙 영도공작에 참여; 1924년 국공합작이후 국민당 제1, 제2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 광주에서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장 대리 역임하면서 <政治周報>를 주관하고, 제6기 농민운동 강습소를 주관함. 1926년 11월에 중공당 중앙농민운동위원회 서기 역임;

1924년 상 해

1927년 대혁명
실패 전야의 무한에서

     1925년 겨울에서 1927년 봄사이 <중국사회의 계급분석 >、<호남농민운동고찰 보고> 등 저작물을 발표, 중국혁명과정에서 농민의 중요성과 농민투쟁과정에서 무산계급 영도의 중요서을 지적하면서 진독수 (陳獨秀)의 우경 사상을 비판;

     국공합작이 전면 파괴된 직후 1927년 8월의 중공당중앙 긴급회의에서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갈파, 혁명무장을 통한 정권 탈취의 전략을 제시했고, 중공당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 그 이후 호남성과 강서성 변경지역에서 추수봉기를 지도; 봉기 이후 잔여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 (井岡山)에 올라 토지혁명을 발동하고 최초의 농촌혁명근거를 건립; 1929년 주덕 (朱德)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 공농혁명군 (이후에 홍군으로 개칭) 제4군을 건설하고, 주덕 군사령관, 모택동 당 정치위원 체제가 등장;이로서 중국의 실제에서 출발, 국민당정권의 통치기반이 비교적 취약한 농촌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최후에 도시와 전국적 정권을 탈취하는 전략을 실천함; 모택동은 <중국의 홍색정권이 왜 존재 가능한가>,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른다>등의 저작을 통해 중국 혁명전략을 제시;

1936년 保安에서

1945년 延安에서

    1930년 5월에는 <교조주의에 반대한다>는 글에서 ‘조사가 없으면 발언권도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으며, 동년 9월에 홍군 제1방면군이 성립되고 총정치위원에 선임; 1931년에 강서성 서금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임; 1933년에 중앙당 정치국 위원으로 피선; 1930년말부터 주덕이 지휘하는 홍군 1방면군은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을 여러 차례 격파. 그러나 왕명 (王明)이 대표하는 좌경 노선이 지도권을 장악하면서 모택동은 당과 홍군의 지도에서 배제되고, 과거와 다른 전략과 정책을 집행, 제5차 ‘포위공격’ 전쟁에서 실패; 1934년 10월에 홍군 1방면군 사령관으로 장정에 참가; 장정 도중 1935년 1월 귀주에서 열린 중공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遵義會議)에서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신 중앙지도부가 확립; 동년 10월에 중공당 중앙과 홍군 1방면군이 陝北지방에 도착, 장정 종결; 동년 12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책략에 대해>란 글을 통해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천명; 1936년 10월 홍군 4방면군과 2방면군이 장정 끝에 감숙성 경내로 도착, 홍군 1방면군과 합류. 동년 12월 주은래등과 함께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켜 항일 공동투쟁의 시국 전환의 주축이 되었고, 36년 12월에는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등을, 그리고 1937년에는 <실천론>과 <모순론>을 발표

1938년 봄, 연안 동굴에서 <지구전론> 집필

     항일전쟁 개시이후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중공당 중앙은 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원칙을 견지, 군중을 동원하고 적 후방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많은 항일 근거지를 건립; 대부분의 항일 근거지는 화북 산간지구에 분포되었지만, 일부는 허북평원지대와 강소 북부평원지대에도 산재; 1938년 10월에 중공당 6기 6중전 확대회의에서 ‘맑스주의의 중국화’를 지도원리로 제안; 항일전쟁시기에 <지구전론> <‘공산당인’ 발간사> <신민주주의론>등 주요 저작을 발표; 1942년에 전당 차원의 정풍운동을 전개,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바로 잡아 항일전쟁과 혁명 승리의 사상적 기초를 구축; 1943년 근거지의 군민과 더불어 생산운동 전개, 엄중한 경제적 곤궁을 극복; 동년 3월에 중공당 중앙정치국 주석으로 피선; 1945년 7차 당대회를 주관하고, <연합정부론>을 발표; 7차 당대회에서 ‘ 우리 당의 영도하에 인민대중의 역량을 동원하여 일본 침략자를 패퇴시키고 전국 인민을 해방하여 새로운 신민주주의 중국을 건립하자’는 전략을 제정; 모택동사상이 7차당대회에서 중공당의 지도사상으로 확정; 7차 당대회부터 1976년 서거시까지 중공당 중앙 주석을 역임

1947년 3월 陝北작전 전야에

     항일전쟁 승리후 공산당과 당의 무장역량을 소멸시키려는 장개석의 시도에 대응; 1945년 8월 중경에서 장개석과 담판, 국내평화 쟁취를 위한 당의 소망을 표명;

     1946년 여름 장개석의 전면 내전 발동이후 모택동은 주덕, 주은래등과 더불어 중국인민해방군을 지도, 적극 방어와 우세병력의 집중과 각개 격파 전략 구사; 1947년 여름에 중국인민해방군은 전략 방어에서 전략 진공으로 전환, 요심-회해-평진등 3대 전역과 1949년 4월의 장강 도강이후의 작전을 통해 국민당정부를 전복; 1949년 3월에 중공당 7기 2중전회에서 당의 공작중심을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 이전하고, 전국적 승리 이후의 각항 기본 정책을 규정하였으며, 여전히 겸허하고 근실하며 교만하지 않으며, 계속 근고분투의 작풍을 견지할 것을 호소; 7월 1일에 <인민민주전정론>을 발표, 인민공화국의 정권 성질과 기본정책 방향을 제시

1949년 건국 선포식 주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임; 1950년 6월 중공당 7기 3중전회를 주관, 국가재정 경제상황의 호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총임무를 제출; 동년 10월에 미군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침공, 중국 동북부를 위협하는 형세에 직면, 항미원조 전쟁을 결정; 1950년-1952년에 토지개혁과 반혁명분자 진압등 민주개혁을 전개하고, 반 부패, 반 낭비, 반 관료주의의 ‘3반’ 운동과 경제사범을 제거하기 위한 ‘5반’운동을 전개; 1953년에 모택동의 건의로 당중앙은 과도기 총노선을 선언, 체계적으로 사회주의공업화와 생산자료 사유제도의 사회주의 개조를 추진; 1954년 모택동이 주관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제정,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번째 주석으로 선임, 1959년까지 역임.

1949년 香山에서 毛岸英, 劉松林, 李訥과 함께

1956년 4월 <10대관계론>을 발표, 처음으로 중국 국정에 적합한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 연이어 중공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천명; 1956년 생산자료 사유제의 사회주의 개조 완성; 동년 9월 중공당은 8차 당대회 소집, 전국인민의 주요 임무가 사회생산력 발전이라고 선언; 그러나 이 방침은 이후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지도공작상의 착오와 좌절을 초래; 1957년 2월에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를 발표, 사회주의 사회내에서의 적과 동지, 인민내부의 두가지 성질이 다른 모순을 정확히 구분하고 대처하는 문제에 대한 학설을 제안

1961년 廬山의 서가에서


     1958년에 대약진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 운동 전개; 1959년 로산 (廬山) 회의 주관, 정책 착오를 바로 잡으로려고 했지만, 회의이후 팽덕회에 대한 비판운동을 발동, 잘못된 ‘반우파’투쟁을 전개; 1960년 겨율 부터 1965년에 국민경제의 ‘조정-공고-충실-제고’의 방침을 실행,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착오를 일부 교정, 비교적 신속하게 경제회복과 발전의 기틀 마련; 이 시기에 모택동은 일부 농촌공작과 좌경 착오를 바로 잡는 조치를 취함

1965년 5월 다시 정강산에 오르다

그러나 1962년 9월에 소집된 중공당 8기 10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일정 범위에서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계급투쟁의 확대를 강조, 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에도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은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이란 관점을 발전시킴; 1963년부터 1965년에 농촌과 도시지역에서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운동의 중점이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가는 당권파’에 두어야 한다고 제안; 50년대부터 모택동은 소련 공산당의 대국주의와 간섭 및 중국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투쟁을 견지 

   1966년 국내 계급투쟁 형세에 대해 극단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문화대혁명’을 발동, 임표와 강청등 두 반혁명집단의 조종등으로 광폭해져 그의 예상과 통제를 크게 벗어나 10여년간 여러 분야에서 엄중한 파괴와 손실을 초래; 모택동은 문화대혁명 과정 중 일부 구체적 착오를 제지, 교정하려고 함. 특히, 모택동은임표 반혁명집단을 분쇄하고, 강청, 장춘교등이 최고 영도권을 찬탈하지 못하도록 함.

1974년 모택동과 주은래가 중남해 유원지에서 악수. 가운데에 등소평이 보임

대외정책 분야에서 모택동은 ‘3개 세계’ 구분의 전략을 제시하고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제안, 대외정책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였으며 현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적 조건을 마련;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서거    

     모택동은 만년에 엄중한 착오를 범했지만, 그의 생애 전체를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그의 공적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그의 과오보다 그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모택동의 공적이 우선적이고 그의 과오는 부차적이기에 아직도 중국인민의 숭배와 경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그의 서거 5년후에 그의 혁명활동과 혁명사상 전체에 대해 중앙위원회 결의 형식으로 전면적 평가를 내린바 있다. 모택동사상은 맑스주의의 중국적 발전이며,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이다. 모택동의 주요 저작으로는 <모택동선집> (4권)과 <모택동문집> (8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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