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교수의 중국정치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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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초점인물-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24 | HIT : 9,019 | VOTE : 898 |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

사망하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총서기였지만,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축출된 후 지금까지 근 16년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 (趙紫陽)이 마침내 지난 1월 17일 사망했다.

 

 
 

    (1) 85세의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자오쯔양 사망하다

지난 2005년 1월 17일, 중국의 관영 신화사통신은 짤막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인민일보가 전재한 신화통신의 자오쯔양 사망 고지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자오쯔양 동지는 장기간 호흡기 계통과 심혈관 계통의 질병으로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최근에 병세가 악화, 응급조치를 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1월 17일 베이징에서 서거. 향년 85” (赵紫阳同志长期患呼吸系统和心血管系统的多种疾病,多次住院治疗,近日病情恶化,经抢救无效,于1月17日在北京逝世,终年85岁)。

이처럼 중국 정부 당국은 신화통신과 인민일보를 통해 가능한 간략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보도하게 하고,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간단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자오쯔양와 1989년 천안문 사태에 대한 당시 당과 정부의 판단과 결정에 착오가 없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와 같이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직접 관계가 없는, 그래서 그 당시의 역사적 결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현재의 지도부까지도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천안문사태의 재평가 요구에 대해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같이 정치적으로 미묘한 잇슈를 만들어 낸 자오쯔양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오쯔양은 지난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한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원로들의 결정에 반대한 탓으로 당 총서기직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고, 지금까지 근 16년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그야말로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당시 당 총서기이었던 후야오방은 정치 분야를, 자오쯔양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 분야를 책임지는 업무 분담체제하에서 이들 두 사람은 덩샤오핑 개혁 개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개혁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국내외에서 사실상 덩샤오핑 후계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1986년말 합비 학생시위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당내 보수파의 공세로 1987년 1월 후야오방 총서기가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후야오방-자오쯔양 양두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비록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격으로 퇴진했지만, 덩샤오핑은 여전히 개혁 개방노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등장, 명실 공히 개혁 지도부의 핵심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9년 후야오방 사망으로 촉발된 대규모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결 방법을 둘러싼 당 내부의 논쟁이 다시 폭발했을 때, 덩샤오핑이 보수파의 견해를 수용, 무력 진압을 결정하자,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덩샤오핑의 이런 결정에 반발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운명은 비극적인 종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자오쯔양은 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실세를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비롯한 8명의 당원로들에게 일시에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무기한의 가택 연금 상태로 유폐되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들 원로들은 자오쯔양을 제거하고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유혈진압을 강행한 다음,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발탁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자오쯔양의 정치적 운명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논쟁과 결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치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서 자오쯔양의 명예와 권리 회복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혁개방의 기수로 시작하여 마오쩌둥 이후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앞장을 섰다가 하루아침에 당 총서기에서 몰락, 모든 권리와 직위를 박달당하고 가택에 유폐되어 16년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보내야했던 불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에 대한 중국 내외의 관심과 연민은 아직도 상당히 깊게 남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 부근 푸창후퉁(富强胡同)의 자오쯔양 자택앞

 따라서 일부 외신에 의하면 자오쯔양의 입원과 사망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베이징 시내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에 위치한 그의 자택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의 옛 부하들이거나 친구들, 그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일반 대중들과 대학생들도 자오쯔양에 대한 동정심과 존경심에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오쯔양 자택 주변에는 평소에도 공안요원들이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고, 일부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공개하고, 공안의 허락을 받아야 자오쯔양 자택에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국의 통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그의 근황을 정확하게 외부세계에 전달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힘든 형편이었다. 그동안 일부 홍콩 언론들은 전화나 또는 인편을 통해 자오쯔양의 근황을 탐색해 보려고 노력했었지만, 단편적인 소식이외에는 자오쯔양의 동향이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일이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다.

1989년 5월 19일 오전 4시 45분 캄캄한 새벽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중인 학생들에게 나타나 울먹이면서 냉정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단식투쟁을 중단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학생 제군,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진 자오쯔양은 이처럼 지난 16년간 거의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 채 감시와 억류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가택 연금이 항상 엄격하게만 집행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90년대에 자오쯔양은 베이징 근교 골프장에서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골프 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으며, 또 일부 지방 여행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언행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일부에서 그의 건강 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망설이 나돌기도 하였다. 금년 2월에 일부 소식통은 자오쯔양이 폐렴으로 3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전하였고, 2004년 4월에는 CNN이 자오쯔양 사망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2) 자오쯔양 연금 해제와 명예회복 청원이 있었지만...

     물론 천안문 사태의 상처가 점차로 아물어지면서 국내외에서 자오쯔양의 연금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축출과 숙청을 직접 지시한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안문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 후임으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이 발탁한 장쩌민 총서기가 물러난 이후에도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 인권단체들이나 국내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로 잡고, 자오쯔양에 대한 연금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맞는 지난 10월 18일에도 자오쯔양 총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천안문사태 당시 자오쯔양을 ‘잘못’ 보좌했으며,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이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7년간 복역한 후 석방, 현재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바오퉁 (Bao Tong)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저명한 민주파 지식인들 69명이 공동 발기인이 되어 ‘자오쯔양 선생 석방과 자유 회복을 위한 인터넷 상의 공개 서명운동’을 착수하기도 하였다. (공개 서명 운동의 인터넷 주소= http://chinaway.org/zzy2004101785/ )

이들은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공식적으로 기소도 되지 않았고,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당과 국가의 원로 지도자인 자오쯔양을 연금하고 그의 인신자유를 구속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런 불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윤리적인 사태를 바로 잡지 않고 어떻게 후진타오 정권이 ‘헌법에 의한 통치’와 ‘공민의 권리 존중’을 주장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정치’를 펼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오쯔양의 연금 해제와 자유 회복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은 누구이고, 자오쯔양 노선이란 무엇인가.

 

    (3) 자오쯔양 (趙紫陽)은 누구이고 趙紫陽 路線은 무엇인가

이처럼 천안문사태이후 16년간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게 살다간 노 정객 자오쯔양은 누구인가. 우선 이 홈페이지 < 중국인물정보-당정간부>에 소개된 간략한 자오쯔양 약력을 여기에 다시 게재하면 아래와 같다

    Zhao Ziyang: 趙紫陽 (1919-2005 ): 천안문 사태 당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강경진압책을 반대하다 실각 당한 중공당 총서기였던 대표적 개혁파 지도자; 河南省 출신; 하남 제1 중학 중퇴; 32년 공청단 가입; 38년 공산당 가입; 하남성 滑縣 당위 서기; 지구 당위 서기; 건국 후에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 광동성 성당위 부서기, 서기; 문혁 당시 일시적으로 숙청되었다 71년 이후 내몽고자치구 서기, 혁명위 부주임; 광동성위 제1서기; 광동성 혁명위 주임; 73년 10기 중앙위원; 75년 사천성 제1서기, 혁명위 주임; 77년 11기 정치국 후보위원; 78년 5기 全人大 부주석;

79-80년 11기 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80년 9월 국무원총리; 81년 11기 중앙위 부주석; 82년 12기 정치국 상임위원; 87년 총서기, 군사위 제1 부주석을 역임; 그러나 천안문사태 직후인 89년 6월 당원 자격을 제외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 연금; 96년부터 광동성과 사천성 시찰이 허용, 가택연금이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지만 2004 년초 폐염등 건강 이상설 제기되고 사망설도 유포; 2005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혈관 질환으로 사망. 향년 85세

위의 간략한 소개 글을 보충하면 자오쯔양은 1919년 10월 18일에 河南省 滑현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이 13세이었던 1932년에 그는 공청단에 가입했고, 19세인 1938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의 본명은 趙修業이었지만, 중학교 시절에 오늘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학습을 하였고, 그가 소속한 지역당 (하남-하북-산동성)위가 운영하는 당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처럼 그의 고향마을이 있는 지역에서 지방 당 활동을 하였고, 1947년 가을에는 지방 군 부대와 더불어 남부 지방으로 이동, 활동하였다.

1949년 10월 건국 후 자오쯔양은 중공당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등을 역임하였으며, 1965년에는 45세의 젊은 나이에 남부 중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광동성의 제1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순탄했던 정치적 성장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좌절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당시 좌파들은 남부 중국의 대표적 당권파인 다오주(陶鑄)를 공격하면서 자오쯔양도 '다오주의 주구'라고 공개 비판하였고, 자오쯔양은 이런 좌파의 공격을 받고 1967년에 실각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서 자오쯔양은 복권되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71년 내몽고 자치구 서기로 재기한 직후, 1972년에 광동성에 복귀, 마침내 1974년에 광동성 제1서기로 재취임하였고, 1975년에는 사천성 제1서기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다시 언급하겠지만, 덩샤오핑의 고향인 사천성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농촌경제를 크게 발전시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입신한 자오쯔양은 1977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 중앙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고, 78년에는 전인대 부주석, 그리고 79년에는 중앙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 이어 1980년에는 중공당의 최고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 되었다.

자오쯔양이 중앙정계에서 이처럼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 정권이 등장하면서 자오쯔양과 같은 개혁적 관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고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당과 국가 기구를 재정비하고 인민대중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이고 경험이 있는 실무관료들이 필요했는데, 자오쯔양은 바로 덩샤오핑이 찾고 있는 그런 실무적 개혁 지도자이었다.

따라서 1980년에 당과 정부기구를 개편하고, 마오시대의 유산인 華國鋒體制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당 총서기로 후야오방을, 그리고 국무원 총리로 자오쯔양을 선임, 후야오방-자오쯔양의 양두 개혁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따라서 1987년초 후야오방이 낙마하기 전까지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후야오방 총서기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오쯔양 총리가 책임지고 추진하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이처럼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지도자로 내외에 알려졌으며, 실질적으로도 거의 모든 주요 개혁 정책은 이들의 책임하에입안되고 집행되었다. 특히, 후야오방이 실각한 이후에는 자오쯔양은 개혁세력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보수파와 맞서 더 대담한 개혁 개방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사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이 실천한 개혁개방정치는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대부분 자오쯔양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혁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추진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관계에 대한 논쟁에서 보수파와 민주파의 의견을 절충하여 나름대로 점진적 개혁노선인 <자오쯔양 노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 노선이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천안문 사태로 자오쯔양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자오쯔양 노선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인가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오쯔양 노선은 아마도 오늘날의 중국 당국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장쩌민과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덩샤오핑 후계 정권의 개혁 노선이 기본적으로 자오찌양의 13차 당대회 정치보고,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 전진하자 (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에서 밝힌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의 이론과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오쯔양의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에 대한 이론과 정책이 집약된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의 자오쯔양 총서기 정치보고 전문은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1)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9.html)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2)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1.html)

결국 자오쯔양 노선이란 국가의 주도하에서 대담한 경제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인 정치개혁도 실천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체제전환을 모색하는 자오쯔양의 정책노선은 1989년 천안문사태로 역사적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실현하려면 더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이 필요하고, 경제개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민주파의 논리와,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용인할 수 있지만, 당국가체제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보수파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자오쯔양과 자오쯔양 노선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내몰린 것이다. 여기서 자오쯔양은 민주파의 논리와 명분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결정에 저항함으로써 마침내 비극적 개혁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4) 중국의 개혁 정치와 정책 논쟁, 그리고 자오쯔양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기념하여 민주파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자오쯔양 연금 해제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미국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자오쯔양의 업적에 대해 검토하기도 하였다.

*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중문으로 쓰여진 것들이며, 이런 논문의 개괄적 내용은 뉴욕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신문 <多維新聞 (2004년 10월 17일자)>의 기사, ‘컬럼비아 대학,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에 대한 연구토론회 개최’를 참고할 수 있다.
(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SinoNews/Oversea/2004_10_17_13_22_10_808.html )

* 또한 위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도 원문 그대로 <多維新聞>에 게재되었다

(i) 鲍彤 : “检验中国宪法的有效性的试金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2_30_788.html )

(ii) 陈一谘:再谈 “我不入地狱,谁入地狱”的赵紫阳精神---“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5_54_661.html)

(iii)汤本:新升的太阳是紫红的---“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8_5_335.html )

(iv) 吴国光:走‘赵紫阳道路’----“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9_31_427.html )

(v) 吴仁华:80年代的精神境界与赵紫阳的政治实践----“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11_45_493.html )

여기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자오쯔양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개혁의 기수로 기술되고 있다. 그는 당과 국가가 문화대혁명 좌파들의 정치투쟁, 사상투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과감한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중국이 부강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도 모택동과 좌파의 영향이 깊이 남아 있었던 1970년대 후반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가장 많은 지방 중의 하나인 四川省 성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농업생산책임제를 도입,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쌀이 필요하면 완리 (万里)를 찾고, 식량이 필요하면 쯔량 (紫陽)을 찾으라 (要吃米,拔万里;要吃粮,拔紫陽)’는 말이 퍼지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인구가 많은 四川省과 빈곤한 지방으로 알려진 安徽省에서 자오쯔양과 완리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경제활동의 자율권을 과감하게 보장하는 당시로서는 대담한 농촌 경제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의 성공에 힘입어 덩샤오핑 정권은 이들이 시험적으로 운행했던 농업생산책임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마침내 중국 경제의 활로를 찾게 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84년 와싱턴에서 부시 당시 부통령과 함께

이처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의 초기부터 실질적인 경제 개혁의 지도자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과감한 경제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자오쯔양은 1980년에 국무원 총리로 발탁되어 1980년대 중국의 경제개혁 전반을 총괄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중국이 도입했던 과감한 경제체제 개혁은 거의 모두가 그의 책임 하에 입안, 집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자오쯔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했으며, 국제대순환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의 중국의 경제개혁은 모두 자오쯔양을 통해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정당화되고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오쯔양의 업적은 경제개혁 분야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987년 1월,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세로 물러나게 되자, 개혁파를 대표하여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취임,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1987년과 1988년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치가 중대한 시련에 봉착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개혁 개방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산출했지만, 시장경제와 계획경제가 충돌하면서 여러 가지 모순과 혼란이 발생하였고, 시장경제의 부작용도 노출되면서 개혁 정책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협공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보수파는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과장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압박하였고, 민주파들은 계획경제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 던지려면 더 대담한 시장경제가 필요 하고, 정치개혁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 국가체제와 계획경제의 기본 틀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라고 주장하는 보수파, 시장경제에로의 이행을 제대로 진행시키고 시장경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경제개혁에 발맞추어 대담한 정치개혁도 추진해야 한다는 민주파의 압박에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양두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후야오방 총서기가 좀 더 민주파 지식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보적 세력의 의견을 반영하였다면, 그렇기 때문에 보수파들의 총공세의 표적이 되어 1987년 1월에 실각하였다면, 자오쯔양은 좀 더 실무관료형 개혁 지도자로서 정치-이념 문제보다는 경제문제에 집중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1987년을 전후로 한 미묘한 시기에 민주파 지식인들보다는 정치안정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권위주의론자들과 연대하면서 민주파와 보수파의 협공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사실 논리적으로 신권위주의론자들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논쟁에서 제3의 중국적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987년 10월의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가 한 정치보고의 제목,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따라 전진하자>는 것은 바로 보수파와 민주파의 주장을 절충하면서도 국가 중심의 단계적 정치-경제의 상호 보완적 발전노선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실 자오쯔양은 이 보고서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당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개혁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오쯔양은 차액선거제도를 전국적이고 전면적으로 확산 적용시킬 것을 선언하였고, 당정 분리, 당기 분리의 원칙을 관철시켜 정부와 사회단체의 분리, 그리고 기업의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려고 하였으며, 다양한 이익집단들과의 상호 협력과 협상을 통해 당의 이익 대표성을 넓히려는 제도 개혁도 강조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당 지배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중국 당국이 추구하는 정치개혁의 기본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오쯔양은 지금 당장 당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서구적인 민주제도를 도입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도 경제개혁과 더불어 점진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당 국가제도의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기존의 당국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천안문 사태로 양극화되기 이전에 중국 사회와 중국 지도부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정책 논쟁은 보수파와 민주파, 그리고 신권위주의론자들간의 미묘한 시각 차이를 보이면서 권력투쟁과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정국을 산출하였다.

특히, 1986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경제적 위기가 복합적으로 사회적 긴장을 높이고, 이에 따라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두개의 기둥으로 형성된 개혁 세력에 대한 보수파들의 대공세가 집중되는 시점에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미묘한 균열이 나타나고, 후야오방의 퇴진으로 이어지면서 천안문 사태 이전에 이미 개혁지도부는 내상을 입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갈등이 언제 어떤 계기로 발생했고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이었는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고, 1986년의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후야오방에 대해 자오쯔양이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1986년 12월 말, 후야오방 총서기가 학생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보수파의 공세에 대해 덩샤오핑이 동조하고, 자오쯔양마저 당 내부 회의에서 후야오방을 비판하자 후야오방 총서기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빠진 것을 알고 크게 낙담, 대성통곡한 후 사임을 결심했다고 한다. (가미무라 고지 지음, 송현웅 옮김, [중국 권력 핵심] (청어람미디어: 2002), pp. 56-63 참조)

물론 자오쯔양 측은 지금도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간의 갈등과 차이는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배신했다’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을 사임하는 과정에서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오쯔양은 이런 점에서 후야오방에 대해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이런 점은 자오쯔양의 측근이었던 张钢이 최근 콜럼비아 대학 학술회의에서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 张钢:“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10)“ <多維新聞 (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5) 천안문 사태와 자오쯔양-- 자오쯔양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정책 노선은 경제 분야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도입등 대담한 개혁 개방을 주장하면서도 정치 분야에서는 당의 지배 원칙에 도전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1986년말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후야오방에 대해서 보수파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총서기로 취임한 이후 후야오방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학생운동에 대해서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마침내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분노를 사, 정치적 몰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 천안문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자료가 공개되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지난 2001년초 장 리앙(張良)이라는 가명의 중국 공산당 간부 출신에 의하여 편찬 출판된 [천안문 페이퍼]가 발표된 이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의 논의과정이 드러나면서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 [천안문 페이퍼] 에 대해서는 이 홈페이지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으니 참고
(http://www.suh-china.com/bbs/zboard.php?id=situati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 무력 진압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부 자료를 폭로한 [천안문 페이퍼]와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면, 당시 총리였던 리펑등은 처음부터 강경노선을 주장했지만, 자오쯔양은 ‘민주와 법제에 의한 해결책’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평화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건한 노선을 주장했던 자오쯔양이 북한 방문 일정 때문에 4월 23일 북경을 떠나고, 자오쯔양 총서기가 부재중에 리펑 총리는 양상쿤 (楊尙昆) 국가주석등의 동의를 받아 덩샤오핑을 설득,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하는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생운동을 정치동란으로 규정하고, ‘기치 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한다’는 당의 방침을 천명한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발표되자 학생들의 반발이 오히려 확대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4월 30일 북한에서 귀국한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참모인 바오퉁으로 부터 이런 전후 사정을 보고 받고, 5월 초에 정치국 상위 등을 통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주장했으며, 대체로 ‘민주와 법제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는 기본 방향에 대해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의 사태는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단식투쟁 등으로 더욱 격렬해 지고 악화되면서 보수파들의 반발도 심화되는 과정에 5월 16일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그리고 고르바초프와 자오쯔양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역사적인 중소 화해가 선언되는 정상회담이 천안문 사태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이었지만, 자오쯔양과 고르바초프 회담에서 자오쯔양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날 오후 5시 40분, 댜오위타이 (釣魚臺) 영빈관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 모두에 자오쯔양은 ‘중대한 문제의 최종 결정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으며, 그런 결정은 덩샤오핑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지난 13기 1중전회에서 내려졌다’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자오쯔양의 이같은 발언의 진의가 무엇이든, 이런 발언이 국내외에 공개되면서 덩샤오핑은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고 중국 정치를 독단하고 있다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오쯔양의 이런 발언이 알려진 직후, 덩샤오핑의 딸 鄧楠이 전화로 자오쯔양을 격렬히 비판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의 폭로는 덩샤오핑에게 모든 비난을 뒤집어 씨우려는 것이라면서 자오쯔양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직후 5월 17일 천안문 광장은 100만의 인파들로 가득 메워졌고,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슬로간 에서부터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까지 등장하면서 천안문 사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 이런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천안문 페이퍼];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핵심]이외에도 최근 자오쯔양의 85세를 기념해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개최된 ‘중국 개혁과 자오쯔양’이란 회의에서 발표된 아래의 글을 참고한 것이다.

-张钢, “ 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沈昆, “赵紫阳在89学运期间的两件大事”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20_9_29_30_656.html)

이런 가운데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원로들의 회의가 개최되고, 이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 방침이 결정되었으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물론 덩샤오핑은 더 이상 자오쯔양을 지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오쯔양에게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자오쯔양은 일단 수궁했지만, 곧 이어 개최된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워회도 계엄령 시행을 결정하자 건강을 이유로 총서기직 사임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5월 19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한 학생들 앞에 나타나 ‘학생제국,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대중앞에서 살아진 이후 오늘까지 오랜 연금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6)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과 정치-경제의 동시적 발전론 좌절

자오쯔양이 1989년 5월 19일 새벽에 학생들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들어 내 고별인사를 하던 그 순간, 자오쯔양 총서기를 수행, 자오쯔양의 바로 뒤에서 굳은 얼굴로 자오쯔양의 연설을 지켜보았던 당시 당 판공실 주임이었던 원자바오 (溫家寶)가 오늘의 국무원 총리가 되어 자오쯔양의 복권 가능성에 대해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직답을 피하고, 대신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역설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의 변화 무쌍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원자바오나 후진타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오쯔양이나 후야오방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내심 인정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장쩌민이나 리펑 등과는 달리, 이들은 천안문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고, 또 당시의 권력 투쟁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 지도부의 정통성은 천안문 사태를 ‘동란’으로 규정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수호했고, 동시에 대담한 경제개혁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덩샤오핑-장쩌민 노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 지도부의 입장에서 천안문사태에 대해 재평가하기 어렵고, 또한 자오쯔양 문제에 대해서도 달리 처리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결국,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개혁파의 지도자로 출발해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역사적 공헌을 했으면서도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불균등 발전과정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모순에 직면,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희생은 결국 중국 현대화과정에서 정치-경제의 동시 발전론의 좌절과 신권위주의와 경제발전 우선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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