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교수의 중국정치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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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는 마오쩌둥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36 | HIT : 9,829 | VOTE : 760 |

모택동 탄생 110주년 기념-다시 살아나는 마오쩌둥


        
1) 모택동 탄생 110주년과 毛澤東 熱

지난 2003년 12월 26일은 모택동 탄생 1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여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모택동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어 또 다른 의미에서 ‘毛澤東 熱’이 재연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아래의 [도표 1] 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중국 사회에서 이른바 ‘모택동 열’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은 여러 차례 등장했었다. 모택동의 고향인 후난성 韶山에 건립되어 있는 모택동 기념관에 참관한 참관인의 수를 기준으로 중국사회에서 나타나는 ‘毛澤東 熱’’의 변화를 측정한다면,  참관인 수에 대한 자료가 공표 된 1964년 이후 기념관 참관인의 수를 기준으로 보면, 모택동 열은 그동안 몇 차례의 고조기와 저조기의 사이클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1966년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예상했던 바와 같이 毛澤東 熱은  최고조에 도달하였고, 모택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두 번째로 높아진 것은 1976년 모택동 사망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표 1 : 모택동 기념관 참관인 수 (1964-2002)]


 중국정치연구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문화혁명 4인방이  제거되고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들이 집권하여 개혁 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1980년대에는 대체로 모택동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저조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경험한 이후 탈냉전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오히려 모택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다시 촉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1993년 모택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모택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2001년과 모택동 탄생 110주년이 되는 2003년에 다시 한번 상승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001년 이후 점차로 모택동 기념관 참관인 수가 증가하다가 2002년에는 일시적으로 사스 (SARS) 여파로 참관인의 수가 축소되었지만 곧 다시 회복되어 비록 도표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2003년도에 다시 참관인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이처럼 모택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중국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고저기와 퇴조기의 굴곡을 그리고 있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의 강도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시기별로 크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문화대혁명기의 毛澤東 熱은 그 내용과 형식뿐만 아니라 강도에 있어서도 다른 시기의 그것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었다는 사실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실 문화대혁명기의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숭배는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고, 일부 신봉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종교적인 색채까지 띤 맹목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비합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택동 사망이후에는 그런 열광적이고 맹목적인 성격의 모택동 열이 재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택동 사망이후 중국 사회에서 등장하는 모택동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존경과 애정, 그리고 일반인들의 소박한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 그런 성격의 서민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근 등장하고 있는 모택동에 대한 관심은 毛澤東 熱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 北京學者:'毛澤東 熱' 區別個人崇拜正走向理性 (  http://news.sina.com.cn/c/2003-12-25/18481431754s.shtml  )

 

 

2)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평가와 毛澤東 熱


두말 할 것도 없이 오늘날 일반 서민들에게서 발견되는 모택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문화대혁명기의 맹목적 숭배와도 다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택동 사망과 문화대혁명 4인방이 제거된 직후, 좌파세력을 단죄하는 과정에서 일부 문화대혁명 受害派들이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해 보였던 증오와 전면적 부정의 태도와도 다른 것이다. 


사실, 문화대혁명시기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후반의 반우파 투쟁시기 당시부터 모택동의 좌파적 성향과 정책 때문에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삶이 뒤틀린 수없이 많은 도시지역의 지식인과 관료들의 입장에서 모택동은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증오와 부정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택동은 진시황제보다 더 폭악적인 전제군주이었으며, 모택동 시대는 결국 억압과 빈곤만을 남긴 낙후와 반동의 시대였다고 단정하면서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부정하지 않고서 중국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까지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모택동은 단순히 부정과 극복의 대상만이 아니었다. 소련의 경우, 1956년의 후루시초프와 1986년의 고르바초프는 모두 스탈린을 매도하고,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소련식 사회주의’를 구원해 보려고 하였다. 이처럼 소련 공산당은 모든 죄악을 스탈린의 과오 탓으로 돌리고 레닌을 부활시켜 사회주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경우는 그런 선택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중국에게 있어서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을 종합한 것 이상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모택동의 역사적 위치는 건국과 경제건설 초기에 스탈린처럼 폭군적 역할도 수행했지만, 중국공산당을 창건하고, 중국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레닌과 같은 역할도 수행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스탈린적 모택동과 레닌적 모택동을 구별하지 않는 한 모택동을 전면 부인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도시 주민들, 특히, 지식인과 관료들에게 모택동은 잔혹한 전제군주와 같은 존재이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모택동은 인민대중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들인 인민 대중들의 영웅이었으며, 인민 대중과 더불어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존재이었다.  바로 이것이 소련과 중국의 개혁정치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사유이기도 하다.


하여간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지배와 중국적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전에는 모택동을 전면 부정할 수 없다는 현실에 봉착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 4인방을 숙청한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사회는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평가하는 기준을 설정하는 문제로 심각한 고뇌를 하게 되었다. 일부 급진적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전면적으로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부정하지 않고서 본격적인 개혁시대를 열어 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보수파는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혁명, 그리고 중국적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등소평의 개혁개방에 찬성하면서도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같이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평가문제를 둘러 싼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고민과 갈등으로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거의 4-5년이 지난 이후에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통과 공포된 ‘건국이래 당이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 (關於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 決議)’가 바로 그것이었다.


<1981년의 역사결의 본문 전문과 그 해설서 번역판으로는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편 허 원 옮김, [정통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서울: 사계절, 1990) 참고>          


이 역사 결의에서 중국 지도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이 인민대중들에게 ‘대재난’을 초래한 모택동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중국혁명과 건국과정에서 모택동의 공적을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981년 역사 결의 제 27항에서 모택동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모택동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다. 그가 10년에 걸친 ‘문화대헉명’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전 생애를 놓고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이 잘못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의 공적이 1차적이고 오류는 2차적이다. 그는 우리 당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설 및 발전과 중국 각 민족 인민의 해방사업의 승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과 우리나라 사회주의 사업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그는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인류의 진보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


이처럼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역사적 역할과 업적을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모택동 사상은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당의 지도 이념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들의 논리는 먼저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분리시켜 모택동은 개인적으로 잘못을 범할 수 있지만, 모택동 사상은 모택동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당과 인민 대중의 집단적 지혜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개혁 개방시대에도 여전히 당과 대중의 지도이념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은 개혁 개방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지도자이고 지도 이념으로 평가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전면적인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개혁 지도부와 지식인 사회의 관심과 평가는 저조한 편이었다. 오히려 모택동 시대는 정치주의와 평등주의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경제발전이 지연되고 중국 사회가 정체된 시대로 인식되었고 비판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전면적으로 개혁개방이 추진되면서 개혁 개방의 긍정적인 효과로 급속도의 경제발전도 실현되었지만, 동시에 고도성장의 부작용도 역시 확대 심화되면서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관심이 재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 이후, 특히 21세기의 부강한 중국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시기에 등장하고 있는 毛澤東 熱은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동경과  오늘의 세태에 대한 비판을 모두 담고 있는 복잡한 대중적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의 재발견


다시 말해 1980년대 개혁 개방파들은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비판하였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 사회는 개혁개방의 부작용이 확산되면서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개혁 개방은 중국 사회의 고도성장을 실현시켰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적 갈등과 균열,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초래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중국은 이미 개발도상국가중에서도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가 심각한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역간, 계층간 불평등은 위험한 수준이고, 황금만능주의적 사조가 팽배한 중국 사회에서의 관료와 간부들의 부정과 부패는 중국의 정치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바로 이런 경제발전 제일주의가 빚어낸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전통적 맑시즘에 실망했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권위주의적 개발독재도 배격하는 신좌파 지식인들로 하여금 모택동 사상에서 새로운 해결방안을 재발견하게 하였으며,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혁명을 위해 희생한 모택동과 인민 대중 중심의 대중민주주의와 평등주의를 주창한 모택동 사상은 새로운 ‘구원’이었다. 


다시 말해  1990년대에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은 경제발전과 현대화의 부조리를 체감하는 대중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구원과 위안의 근원으로 부활하고 있다. 이런 마오쩌둥의 부활에 대해 필자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일찍이 소개되었던 글과 그에 대한 필자의 논평을 아래에서 소개한다.



(3-1)   정길화 PD의 중국 엿보기--불티나게 팔리는 '상품 마오쩌둥'


판자위안(潘家園)은 베이징(北京)에서 유명한 골동품시장이다. 우리로 치면 서울의 인사동과 황학동을 합해 놓은 듯한 분위기다. 중국의 골동품 하면 흔히 베이징의 류리창(琉璃廠) 거리를 떠올린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패키지 관광 코스이기도 한 유리창 거리는 가짜들의 범람으로 사람들이 외면해 이미 썰렁해졌다. 반면 판자위안에서는 아직까지는 잘만 고르면 꽤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베이징 생활 초보자의 눈길도 능히 유혹해 매료시킬 만한 곳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베이징의 어느 늦은 여름 일요일, 뙤약볕에 시달리며 찾아간 판자위안은 가히 별천지였다. 가게마다 중국의 오래 된 물건이 즐비하다. 도자기․서화․고가구 등이 길가 가득 널려 있고, 지천으로 쌓여 있다.


골동품 시장에 넘쳐나는 '마오' 상품들


그것들이 진품인지 아닌지, 혹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의 감식안은 내게 없었다. 거액을 들여 명․청대 도자기를 살 만한 호사스런 취미를 가질 형편도 못됐다. 그저 두루 스치면서 어설픈 중국어로 회화실습이나 하자는 심사였다. 한편으로는 중국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다 싶어 천천히 걸으면서 나름으로는 유심히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봤다. 무엇을 고르면 먼저 손님에게 얼마를 주겠느냐고 묻는 특이한 흥정 방식은 소문대로였다. 가격을 부르면 무조건 절반 이상, 심지어 80% 이상 깎고 보아야 한다는 풍설을 믿고 그대로 했다가는 별로 재미를 못본다.


상인들도 이력이 나 있어 그런 사람에게는 아예 대꾸를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밀고 당기는 흥정 없이 그냥 살 수는 없다. 물건을 둘러싼 흥정에는 자못 팽팽한 긴장감과 꽤 그럴 듯한 재미가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판자위안 시장을 구경하던 내게 눈길을 끄는 물건들이 있었다. 이상하다. 여기는 골동품시장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저런 물건들이 있을까…. 그것도 한두 집이 아니다. 거의 대단한 컬렉션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에 관련된 옛 물건들이었다.


마오쩌둥의 젊은 시절부터 전성기까지의 얼굴이나 사진을 비롯해 30, 40년 전에 나왔음직한 배지, 흉상 등이 소장가와 수집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량이나 수준이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장난이 아니었다.


주말에 골동품 벼룩시장이 서는 판자위안은 중국에 존재하는 모든 마오가 다 쏟아져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오래 된 알람 시계 속에서 두 팔을 치켜들고 시계추와 바늘이 된 마오, 대장정 당시의 홍군(紅軍)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마오의 조각상, 갖가지 배지로 진열된 마오의 얼굴, 상패 속에 조각된 마오 등.


그 모든 마오의 공통점이라면  시장에 내놓인 마오라는 것이다. 2002년, 오늘의 마오는 베이징의 시장 좌판에 진열되어 손님들을 호객하고 있다. 호객당한 손님이 주머니에서 꺼내든 100위안이나 50위안짜리 지폐에서도 마오가 튀어나온다. 주인과 손님은 마오를 사이에 두고 호객하고 흥정하면서 마오를 팔고, 마오를 사고 있다.


물론 그들이 마오를 팔고, 마오를 사는 목적은 저마다 다르다. 주인은 돈을 벌기 위해, 손님은 집안에 장식해둘 복과 행운의 상징으로 마오를 사려는 것이다.  대장정의 성공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듯, 죽어서도 마오는 그의 인민들에게 살아있는 꿈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은 이제는 물신화되고 기복화된 모습으로 제각기 다른 형상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은' 마오쩌둥의 '還生'


현대사에서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마오라지만,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답게 판자위안 골목에서 마주치는 붉은 바탕의 마오 얼굴은 사실 그리 각별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공연히 이것저것들을 들추어보다 슬며시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가게마다 진지한 얼굴의 중국인들이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흉상을 만지며 상념에 젖어 있는 듯한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이 물건들이 다 어디에 있다가 여기까지 흘러나온 것일까.


어쨌든 마오는 지금 중국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마오도 트렌드를 이루는 상품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이미 마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듯했다. 마치 쿠바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가 오늘날 ꡐ혁명정신ꡑ마저 상품으로 만드는 상업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길거리 젊은이들의 겉멋 들린 티셔츠와 가방 등의 장식용 인형으로 부활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마오쩌둥은 1976년 9월9일 사망했으니, 어언 26년전 일이다. 그렇지만 죽은 마오는 실은, 적어도 중국인들에게는 죽은 것이 아니다. 마치 불로장생을 꿈꾸다 나이 50도 못되어 절명한 진시황제가 무덤에서 살아나와 지금까지도 우리 눈앞에 현신해 있듯, 죽은 마오도 중국인들에게 환생을 거듭하고 있다.


알고 보니 이러한 마오쩌둥에 관한 추모 열풍은 최근 중국 사회의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마오쩌둥은 판자위안의 골동품 가게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두번째 혁명인 시장사회주의를 주도하는 화폐로도 되살아났으며, TV 드라마 속의 영웅으로, 심지어 중국인들의 현세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신(祈福神)이 되어 있었다. 이런 마오쩌둥 추모 열기의 시작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부터 그 열기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톈안먼 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학생들과 지식인 그리고 기층 민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열기였다.


당시는 옛소련이 해체되던 시기였고, 서방세계로부터 '중국위협론'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ꡐ괴담ꡑ이 유행하던 때이기도 했다. 국내외적인 격변을 경험하고 목격하는 동안, 중국 사회에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 나름의 애국심을 마오를 향한 추모 열기로 뿜어냈던 것이다.


1991년 12월 중국의 어느 음반회사는 마오쩌둥 탄생 98주년을 맞아 붉은 태양(紅太陽)이라는 기념 음반을 발매했다. 그런데 이 음반이 생각지도 않았던 대박을 터뜨렸다. 전국에서 '붉은 태양'이 연일 울려 퍼지고 마오 주석에 대한 꿈틀거리던 '회념'(恢念)도 일시에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마오 열기는 텐안먼 사건 이후 '좌절의 반영'


출판업계에서도 마오 주석 관련 서적이 붐을 이뤘다. 급기야 대형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는데 가슴에 마오쩌둥 배지를 착용하고 있었던 사람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전설 같은 얘기가 회자되면서 마오 주석은 인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호신으로까지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마오의 초상화는 그의 사망후 한때 사라지는 듯하더니 문화대혁명 때처럼 다시 집집마다 벽에 내걸리기 시작했다. 마오를 향한 이런 추모 열기는 이제 정치적 상징 조작을 위해 동원된 강제가 아니라 개인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가히 중국 인민들의 자발적인 ꡐ민간신앙ꡑ으로 부활한 것이다.


죽은 공자는 문화혁명 당시 중국의 모든 악의 근원으로 치부되어 부관참시와도 같은 모욕까지 당했다. 최근 들어 다시 ꡐ유교적 가치의 재발견ꡑ으로 그 공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 마오도 실은 죽었다가 살아난 공자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공자가 여전히 봉건적 사상의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데 반해, 마오의 공과(功過)는 '역사적인 결의'를 통해 공개적인 비판과 검증을 받고 완전히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그저  '단순한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1990년대 이후 붉은 태양으로 재등장한 마오의 부활이 의미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국인들은 왜 다시 마오를 정신적 아버지로 불러들인 것일까. 중국의 흐름을 읽어내는 사람들은 이를 '좌절의 반영'으로 풀이하고 있다.


오히려 1980년대에는 마오쩌둥에 대한 냉대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1960~70년대 중국현대사의 실패에 대한 비관의 발로였다고 한다면, 1990년대의 마오 열기는 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정신적 대안의 부재 속에서 나타난 역현상이라는 것이다. 좌절된 정치적 민주화의 꿈과 개혁개방 정책 이후 나타난 빈부격차, 자본주의적 경쟁의 심화를 경험하면서 중국인들은 과거 마오 시절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비록 경제적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못했지만, 그때는 그래도 다같이 못사는 평등주의가 실현된 사회였다고 회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그리워한 것은 마오 시절의 가난이 아니라 바로 평등을 추구했던 ꡐ인민주의ꡑ였다고나 할까.


특히 오늘의 시장경제체제와 급격한 사회적 변혁에서 오는 여러 가지 사회적 역기능에 대하여 우려하고 반발하면 할수록 그 옛날의 순수에 대한 향수와 동경은 더 깊어만 간다ꡑ(ꡐ이중 기행평전-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 중에서)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마오 열기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향수와 동경이 묻어나고 있다.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동경은 단순한 인민주의뿐만 아니라 도덕이 살아 있던 시절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시장경제 도입 이후 증가하고 있는 일부 간부들의 부패와 사회적 타락이 적어도 지위 고하 간에 사는 데 별반 차이가 없었던 마오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들을  사회주의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자동차 실내 등에 마오의 미니어처를 걸어 놓거나 집벽면 한쪽에 마오의 사진을 걸어 놓고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의 대상이 된 마오는 무엇에 대한 향수와 동경일까.


'마오 주석이 살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특정 종교와는 거리가 먼 중국인들은 ꡐ복ꡑ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신이라도 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지만, 마오가 ꡐ복ꡑ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엉뚱하기도 하고 미상불 재미있는 일이다. 월드컵때 넘쳐나던 붉은악마들의 태극기와, 태극기를 변형한 각종 물건들을 보는 느낌과 비교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마오는 확실히, 중국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


또 한가지 사실. 1990년대 이후 마오가 불세출의 영웅으로 되살아난 사회적 근저에는영웅을 필요로 하는 중국사회의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 특히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의 중국위협론이 가속화되고 지난 1999년 주 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이 미국 전투기에 의해 폭격당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중국인들은 중화민족주의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사명감을 직시하게 되었다.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해 매진하는 현 중국의 분위기에서, 자국의 대사관이 폭격당해도 주변의 평화를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던 중국정부의 ꡐ냉정한ꡑ 판단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유행하던 말투 중의 하나가 바로 마오 주석이 살아 있었더라면…이었다.


즉 '마오 주석이 살아 있었더라면 미국과 전쟁을 하는 한이 있어도 그 분노를 참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마오 주석이 살아 있었더라면…'이라는 어법 속에 녹아 있는 '향수와 동경'은 바로 중화민족주의이다. '중국은 정신적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어느 중국 대학생의 말과도 같이 살아 있는 마오는 또한 중화민족주의의 정신적 대부로 다시 불려 현세로 나왔다.


2002년. 베이징의 판자위안 거리에 벌여진 마오의 좌판은 오늘도 손님을 호객하고 있다.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이를 수집하고, 이에 심취하고 있다. 세상이 변하면 혁명과 반혁명의 전선도 변하듯, 세상이 변하면 마오도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부활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판지위안은 오늘날 중국의 한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기념으로라도 '마오 물건'을 살까 하다 끝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파트 빈 벽에 걸어놓을 시대 미상의 와당 두 점을 치열한 흥정 끝에 120위안(우리 돈으로 1만 8,000원)을 주고 샀다. 어쩐지 '초짜'의 중국 탐험이 잘 될 것만 같다.


중국에서는 물건을 산 뒤 자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3-2)  마오의 현대적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대단히 흥미있는 기사를 소개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강의 중에 애증의 대상으로 마오가  중국의 일반 대중들의 생활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는데, 바로 이런 취지에 맞는 기사를 소개해 주어 고맙습니다.  사실,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시대에 마오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까, 또는 애정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단순한 기복사상과 같은 민간 차원의 미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 대한 깊은 반감의 표시일수도 있습니다. 특히, 중국적인 자존심과 전통을 무시하는 서구화-세계화에 대한 반발이 직- 간접적으로 마오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하려고 하는 심리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오의 사상으로 서구화의 병폐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신좌파들의 논리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연구와 쟁점> 게시판의 용도
  나에게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공산당의 힘 : 개혁개방기 중국공산당과 권력구조의 변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과 헌법 개정안의 내용과 성격
  부강한 중국의 등장과 '신조선 책략'
  다시 살아나는 마오쩌둥
  중국의 개혁전략과 개혁정책 변화
  자료: 개혁개방시기 중국공산당과 권력 엘리트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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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차 인구조사와 중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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